수련중에 경험하는 고요가 있으며 고요에는
두가지 속성이 드러난다.
첫번째 고요는 어떤 자극이나 소리가 최소화
되어있는 물리적 고요이다... 사람들에게 익숙한 고요이다.
역설적으로 우리들은 물리적 고요상태에서
더 많은 생각을 일으키고 심리적 어려움을 경험한다.
따라서 수련의 실천과 물리적 고요를 필수적
조건으로 알고 있다면 잘못된 이해이다.
물리적 고요에 대한 오해는 명상이 사람들에게
벽으로 느껴지는 가장 분명한 이유였다.
이상하게도 물리적 고요에 도달할수록
고요를 대신하여 생각이 크게 드러나 혼란스럽다.
물리적 고요는 먹기 어려운 버섯과 닮았다.
어린시절을 비유하자면 어느날 엄마가 아이에게
맛은 없지만 건강에 좋으니 버섯을 참고
먹어야 한다고 강요한다.
표정은 협박... 언어는 사랑이다...
건강을 위해서 참고 삼켜야한다는 엄마의 강요에
몇번은 먹게 되지겠만 결국 실천은 불확실하다.
직접 수련을 지도해왔고 내가 체험한 결과를 참고해도
명상은 현대인들이 몸과 감정적 고통을 치유하는데
이보다 우수한 명약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접근방식에서 아쉬웠던 점은 버섯처럼 건강에
좋으니 접근성이 없어도 그냥 참고 삼켜야 한다는
방식은 생각해 볼 시점이다.
두번째로 우리가 몰랐던 고요의 또 다른 얼굴...
물리적인 고요가 아니지만 내면은 절대고요에
도달한 상태로 사마타적 (집중상태) 고요가 있다.
명상을 수단으로 생사고해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면 물리적 고요, 또는 사마타적 고요의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바로 절대고요로 도달이 가능하다.
효과는 가장 궁극적이지만 일반대중이 접근하기에는
너무힘든 장애물과 강인한 노력의 지속이
요구되는 수행자의 영역이다.
완화된 접근 방법으로 중력수련은 사마타적 (집중상태)
고요에 도달하기 위한 촉진자로
사운드힐링을 사용한다.
그동안 명상수련은 시대적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
적용의 대상과 공간적인 배경에 아쉬움이
있다는 생각을 지울수 없다.
수행자란 생사고해의 이치를 깨달으려 현재 삶의
궁극적 괴로움을 예견하고 출가한 분들이다.
수련자란 지금에 고통을 해결하고 좀더 편안함을
구하려는 사람들 중심이다.
수행과 수련은 비슷하지만 그 동기를 바라볼때
방법의 적용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될 수 있다.
수행과 수련의 적정함에 관한 정리를 해보면
명상수련은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사람들에게 길잡이 역할이 될 것이다.
깨달음을 구하고 궁극적 해탈이나 평정을
구하려는 동기가 확실하다면 이것은
수행자의 길이다.
정신, 신체의 에너지를 효율화하고 개선하므로
내삶에 제약요인을 제거하며 내적인 힘을
기르는 동기라면 수련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속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
또는 사화적인 관계사이... 생각과 생각 사이에
지속적인 긴장과 불만족이 흐르고 있다.
고통을 회피하려는 인간의 심리적 경향은
긴장과 불만족을 애써 외면하거나 무의식의 영역으로
보내고 있지만 축적된 긴장과 불안은 드러나지 않는다.
쌓여가는 긴장과 고통의 에너지는 결국 터질 날만
기다리며 그림자로 남아 있다가 몸과 에테르체 이하에서
감정체의 손상으로 발전한다.
손상된 감정체는 반드시 치유 되어야 하는데 방법은
경험과 전문성이 요구되며 그 조건은 정신물리적
고요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포즈윈 중력수련이 발전해 오면서 고요를 어떻게
쉽게 사용하면서 힐링의 목적과 함께 할 것인가를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내가 찾아낸 혁신의 열쇠는 고요를 2가지 특성으로
나누고 지금 시대에 맞는 고요를 치유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